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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 6대 관장 P. Billings
작성일
2011-04-14 09:40

6·25 직후 10년간 전쟁고아 돌본 페기 빌링스氏… 복지재단 90년 맞아 訪韓
"한국서 보냈던 시간들이 내생애 가장 아름다운날"

"부서지고 불에 탄 집들 사이에 아이들이 버려져 있었어요. 한국의 요즘 젊은이들은 아마 상상도 못할 겁니다."

4일 서울 코리아나호텔에서 만난 페기 빌링스(Billings·82)는 "한국은 놀랍다. 내가 알던 6·25 전쟁 직후의 한국과는 모든 면에서 비교할 수도 없게 성장했다"고 말했다. 그는 1921년 설립된 태화복지재단의 6대 관장(1953~1963)을 지낸 인물이다. 그의 나이 30세를 전후한 시점이었다. 이번 방한은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태화복지재단 창립 90주년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50여년 전에 10년간 관장으로 일했던 태화복지재단의 설립 90주년을 맞아 한국에 온 페기 빌링스씨. 그는“여생은 북한 어린이들의 인권 개선을 위해 살고 싶다”고 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24세이던 1953년 1월 한국에 온 첫날, 빌링스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기 힘들었다고 한다. "길거리 곳곳에서 아이들이 부모를 잃은 채 병에 걸려 신음하거나 울부짖고 있었어요. 한국은 말 그대로 폐허였습니다." 그는 "당시의 태화복지재단도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며 "서울 인사동의 허름한 건물에 선교사 3명과 직원 20명이 일했는데 시설은 열악한 편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래도 모두 한국인을 돕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고 했다.

그는 "돌봐줄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도와주고, 신문광고를 내서 의사들을 모집해 건강 상태를 검진해주고, 집 없이 떠돌던 전쟁고아들을 위해 야학도 개설하면서 바쁘게들 일했다"고 했다. 현재 태화복지재단은 서울·인천·광주 등 9곳에 복지관을 갖춘 꽤 큰 단체로 성장했다.

"낮에는 힘들게 구두를 닦아 생활비를 벌고 밤에는 졸린 눈을 비벼 가며 열심히 수업을 듣던 아이가 있었어요. 5~6년쯤 지났을까, 걔가 결혼을 한다며 여자친구를 데리고 왔어요. 식당 종업원으로 취직도 했다면서요…. 50년도 더 지난 일이어서 이름도 기억 못하지만 고맙다고 인사하던 그때 소년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빌링스씨는 10년간 태화복지재단 관장으로 일하다가 1963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에 가서도 한국인 인권에 관련한 일을 많이 했다. 1975년부터 15년간은 '한국 인권을 위한 북미 연합(North American Coalition for Human Rights in Korea)'의 대표로 일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날들이었어요. 남은 인생은 특히 북한 어린이들의 인권 개선을 위해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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